티스토리 뷰
목차

솔직히 저는 제가 화를 잘 다루는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6개월, 21개월 연년생 아들 둘을 키우면서 웬만한 건 버텨왔다고 자신했는데, 7월 들어 첫째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를 냈던 제 모습을 되돌아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이에게 화를 낸 기억이 아이 마음속에 어떻게 남는지, 그 기억을 실제로 지울 수 있는지 궁금한 분들이 많을 텐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합니다.
예측 불가능한 감정 표현이 아이에게 남기는 것
부모가 욕을 했다, 큰 소리를 질렀다. 이걸 들으면 많은 분들이 "욕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봤습니다. 그런데 아동심리 전문가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시각이 조금 달라집니다. 욕이나 부정적인 메시지보다 훨씬 더 아이를 힘들게 하는 건 부모의 감정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unpredictability)입니다. 여기서 예측 불가능성이란 아이가 자신의 어떤 행동이 부모의 화를 촉발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아이는 만성적인 각성 상태, 쉽게 말해 항상 눈치를 보며 긴장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금요일 아침, 등원 준비를 마치고 온 가족이 차에 탔을 때 일이 기억납니다. 첫째가 아내 얼굴을 갑자기 만졌고, 출근 화장을 막 끝낸 아내는 본인도 예상 못 한 강도로 반응했습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평소 다정한 엄마가 갑자기 전혀 다른 표정으로 변한 것입니다. 어린이집에 도착할 때까지 첫째가 많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저는 그 얼굴을 보면서 "아, 아이는 지금 엄마가 무서운 게 아니라 왜 화가 났는지 이해를 못 해서 더 무서운 거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아동발달 연구에 따르면 만 5세 이전 언어 이전 단계의 아이는 부모가 무슨 말을 하는지보다 얼굴 표정과 목소리 톤, 즉 비언어적 신호를 먼저 처리합니다(출처: 미국소아과학회(AAP)). 5세를 넘어가면 언어 처리 능력이 발달하면서 내용까지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너는 왜 항상 이러니"같은 말이 자아상(self-image)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자아상이란 아이가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바라보는 내면의 자기 개념입니다.
- 예측 불가능한 화 → 아이의 만성 긴장 상태 유발
- 5세 이후부터는 말의 내용이 자아상에 직접 영향
- 감정이 강렬할수록 기억은 더 오래, 더 선명하게 저장됨
기억을 지운다는 것의 진짜 의미 — 감정 계좌
"아이 기억에서 나쁜 모습을 지울 수 있을까요?" 많은 부모가 이렇게 묻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억을 지운다는 건 사건의 내용을 삭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 인출(memory retrieval)의 순서는 감정 강도에 따라 정렬됩니다. 여기서 기억 인출이란 뇌에 저장된 정보를 꺼내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그 순서가 사건 발생 순서가 아니라 당시 감정의 강렬함 순으로 정렬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러니 "엄마 하면 뭐가 생각나?"라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욕하던 순간이라면, 그건 그 기억에 붙어 있는 감정이 그만큼 강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억을 '지운다'는 표현은 정확히는 그 기억에 붙어 있는 감정의 강도를 희석시키는 것입니다. 방법은 생각보다 명확합니다.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꾸준히 쌓아서 감정 계좌(emotional bank account)의 잔액을 늘리는 것입니다. 감정 계좌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쌓인 긍정적 경험의 총량을 은행 잔고에 빗댄 개념으로, 잔고가 많을수록 부정적인 사건 한두 개가 관계 전체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느낀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화를 낸 날 저녁에 아이와 같이 뒹굴며 한참 놀아줬더니 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아빠, 오늘 재밌었어"라고 하더군요. 물론 한두 번의 긍정 경험으로 다 상쇄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계좌가 비어 있는 것과 채워져 있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6학년쯤 되면 아이는 부모를 독립된 한 인간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는 사춘기 초입에 접어듭니다. "다른 엄마들은 안 그러는데"라는 말이 나오는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이 시기 이전에 감정 계좌를 채워두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미국심리학회(APA)는 부모-자녀 간 안정 애착이 아이의 정서 조절 능력과 직결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여기서 안정 애착(secure attachment)이란 아이가 부모를 안전 기지로 신뢰하고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감정을 회복할 수 있는 심리적 유대감을 뜻합니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화남 루틴 만들기
"감정 조절을 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근데 막상 화가 치밀어 오르면 이게 왜 그렇게 안 되는 걸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화를 잘 참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억압해 두다가 엉뚱한 순간에 터뜨리거나, 아니면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단호하게 나가는 식으로 어딘가에서 반드시 표출되더라고요. 이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행동 수정 기법(behavior modification) 중에 실용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행동 수정 기법이란 특정 행동 패턴을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대체 행동을 훈련시켜 습관을 바꾸는 심리학적 접근법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화가 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쏟아내던 말 대신, 딱 한 문장만 정해두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지금 많이 화가 났어." 이 문장만 뱉도록 훈련하다 보면 뇌가 화난 상황에서 그 문장 외에 다른 루트를 만들지 않게 됩니다. 저도 올여름부터 "아빠 지금 좀 힘들어, 잠깐 기다려줘"라는 문장을 정해두고 쓰고 있는데, 처음엔 어색해도 몇 번 하니까 습관처럼 따라옵니다.
또 하나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은 화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나오는지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워킹맘, 워킹대디라면 퇴근 후 집에 들어서는 순간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미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집이 어질러져 있거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면 욱하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체력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제 경우도 아내가 혼자 아이 둘을 감당하다 지쳐서 모진 말이 나오는 시점이 대개 저녁 6~7시, 아이들이 동시에 한계에 다다르는 타이밍과 겹칩니다. 아내와 그 시간대를 의식적으로 분담하기로 한 뒤로 상황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화를 낸 뒤라면 사과가 필요합니다. 단, 매번 화내고 사과하기를 반복하면 아이에게 예측 불가능성이 다시 생깁니다. 사과는 진지하게 한두 번, 그리고 행동이 실제로 달라져야 합니다. 아내가 그날 저녁 첫째에게 아침 상황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이가 금세 풀리더라고요.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힘이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릴 때 부모한테 욕을 들은 기억이 아이에게 얼마나 오래 남나요?
A. 기억의 지속 기간보다 기억에 붙어 있는 감정의 강도가 더 중요합니다. 당시 아이가 받은 충격이 클수록 기억은 더 선명하게 오래 남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충분히 쌓이면, 같은 사건도 감정 강도가 희석되어 덜 자주 떠오르게 됩니다. 기억 자체를 삭제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는 시각도 있고, 저도 그쪽에 동의합니다.
Q. 아이한테 욕이나 심한 말을 한 뒤 사과하면 효과가 있을까요?
A. 사과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화내고 사과하는 패턴이 반복되면 아이 입장에서는 그것 자체가 예측 불가능한 루틴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사과는 진지하게 한두 번 하되, 이후 실제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말로만 반복되는 사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약해진다는 시각도 있는데, 저도 경험상 그렇게 느꼈습니다.
Q.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면 화가 더 자주 날 수밖에 없는 건가요?
A. 구조적으로 더 힘든 건 맞습니다. 두 아이가 비슷한 시기에 감정이 폭발하면 부모가 감당할 자원이 분산되기 때문입니다. 이걸 의지력만으로 해결하려는 건 체력 문제를 정신력으로 덮으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모 중 한 명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다른 한 명이 화가 났을 때 중재할 수 있는 역할 분담 구조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많습니다.
Q. 아이에게 화날 때 미리 예고하는 게 실제로 효과가 있나요?
A. 예고 자체가 아이의 불안을 줄이는 데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네가 이걸 안 하면 엄마가 화낼 거야"라고 미리 알려주면, 아이는 적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서 심리적 긴장이 낮아집니다. 예측 가능성이 확보될수록 아이가 스스로 행동을 조절할 여지가 생긴다는 시각도 있고,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매번 예고가 가능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에 완벽한 방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결론
저도 이 주제를 정리하면서 다짐을 다시 했습니다. 화를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고, 그걸 목표로 삼는 건 오히려 죄책감만 키웁니다. 현실적인 목표는 화가 터지는 상황의 구조를 파악하고, 화남 루틴 한 문장을 정해두고, 평소 감정 계좌를 꾸준히 채우는 것입니다. 아이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 기억이 아이를 찾아오는 빈도와 감정 강도는 지금 이 순간부터 바꿀 수 있습니다.
이 글이 저처럼 아이에게 화낸 뒤 한참 자책했던 분들께 조금이나마 방향이 됐으면 합니다. 오늘 저녁, 아이와 한 번 더 눈을 맞추고 같이 뒹구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iu56mfrQTc&t=3s